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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김형중 목사 (어스틴 우리 침례교회 담임)

영화 ‘곡성’은 많은 이들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영화의 난해함은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여 세인의 입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습니다. 특히 어린 여배우의 한 마디 대사는 수많은 추측 가운데 영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뭣이 중헌디?” 이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한 일갈 이기도 했습니다. 진리를 진리라고 말할 수 없고, 거짓을 거짓으로 분별할 능력을 상실한 시대를 향한 처절하고도 간절한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의 달란트 비유는 이 외침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야기는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5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2달란트,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1달란트를 나누어 줍니다. 이들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을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그곳에 감추었습니다.

과연 주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랜 후 주인이 돌아와 결산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왔을 때 주인은 말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마 25 : 20)  다섯 달란트는 적은 돈이 아닙니다. 5 달란트는 오늘날 원화로 환산하면 대략 20억 정도 되는 큰 금액입니다. (하루 임금을 5만 원으로 계산했을 시 추정액). 게다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왔으니 10달란트, 즉 40억이나 되는 큰 이익을 남겼습니다. 분명히 적은 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니 주인은 분명 그 금액에는 큰 관심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금액은 갑부인 주인에게는 적은 금액일 수도 있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면 이 사실은 좀 더 명확해집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두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왔을 때 주인은 말합니다. 주인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도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온 종에게 했던 것과 같은 칭찬을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마 25:23) 두 달란트 역시 적은 돈은 아닙니다. 두 달란트는 대략 8억 정도 됩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두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왔으니 4 달란트, 즉 16억이 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종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칭찬을 합니다. 결국, 주인은 종의 이익의 양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 가지고 온 종에게 주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 부분이 달란트 비유 해석의 열쇠가 됩니다. 한 달란트 가지고 온 종에 대한 주인의 반응은 앞선 두 종과는 다릅니다. 26절에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 네가 알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왜 이런 싸늘한 반응을 보였을까요? 24절에 종은 “주인이여 당신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이 심고 뿌려 놓은 것을 거둬들이는 지독한 분으로 알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를 당연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종은 나름 합리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워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이 여기 있습니다.” 당시 문화를 고려하면 이는 그렇게 나쁜 행동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땅에 묻는 것은 일반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주인은  “그렇다면 내 돈을 관리하는 자(money exchanger )들에게 맡겼다가 내가 돌아왔을 때 이자와 원금을 함께 돌려받았을 것이다”라며 악한 종에게 호통을 칩니다. (27절) 어쩌면 분별력 없는 종을 향한 주인의 절규였는지도 모릅니다: “뭣이, 중헌디? 거시기, 답답해 죽것네. 내 맘 몰라 주능겨!” 결국, 주인은 그 종을 무익한 종이라고 합니다. 위 두 종과 비교해 볼 때 충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더는 맡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 종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달란트를 빼앗아 믿을 수 있는 다른 종에게 주었습니다.

주인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적어도 우리 생각처럼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많은 양을 내는 것도 중요하고, 많은 시간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더 중했습니다. 주인은 자기 뜻을 제대로 파악해서 믿음을 줄 만한 종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충성’으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고 다짐할 때 사용하는 ‘Loyal’의 의미가 아닙니다. 헬라어 ‘피스토스’는 ‘믿을 만한’이란 의미입니다. 굳이 영어 표현을 빌리자면 ‘Faithful,’ ‘Trustworthy,’ ‘Reliable,’ and ‘Believing’에 해당합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할 때도 같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고전 4:2) 맡은 자가 주인에게 주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결국,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님께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달란트의 크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달란트의 크고 작은 것과 경중을 나누지만, 주님께서는 그 크고 작음을 나누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받은 그 달란트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님께서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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