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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지나며


광야를 지나며

김형중 목사 (어스틴 우리 침례교회 담임)

얼마 전에 가족과 함께 그랜드캐년을 다녀 왔습니다. 어스틴을 출발해서 그랜드캐년에 이르는 일반적인 여행경로를 따랐습니다. 텍사스 초원을 지나, 뉴멕시코 광야를 거쳐, 애리조나 사막을 지난 후에 그랜드캐년 일대를 여행했습니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이 여행 경로의 백미는 그랜드캐년의 웅장함도, 산타페의 평화로움도, 세도나의 아름다운 저녁노을도, 그리고 경이로운 곡선을 자랑하는 엔털롭 캐년의 자태도 아닙니다. 다름 아닌, 텍사스의 초원을 거쳐 애리조나에 이르는 광야 그 자체입니다. 지루하리만큼 드넓게 펼쳐지는 광야의 향연 속에서 장엄한 창조주의 손길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드넓은 광야, 그곳에 서면 왜 그리도 하늘이 가깝게 보일까요? 광야에 서면 유난히 하늘은 넓게 보입니다. 굳이 하늘을 보려고 의식하지 않아도 하늘은 어느새 땅에 내려앉습니다. 광야에 서면 하늘은 손에 잡힐 듯 다가와 다정한 벗이 됩니다. 광야에 서면 하늘은 벗이 되어 속삭입니다: “나와 함께 길을 걷자.” 일상을 벗어나 광야에 서면 하늘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됩니다. 광야에 서면 손 내밀지 않아도 하늘은 먼저 손 내밀어 다정한 친구가 됩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것처럼… 광야에 서면 하늘은 광야를 걷는 이들에게 친절한 길벗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 전 거쳐야 하는 훈련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서면 하늘이 가장 가깝게 보였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면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하늘은 그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서면 하늘은 그들에게 항상 속삭였습니다: “나와 함께 걷자!” 광야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자연스럽고 다정하게 그리고 친밀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서면 자연스레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임재 훈련 장소로 시내산을 택하지 않고 광야를 택한 이유입니다.

광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드바르”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전치사 “민”(∼로부터)과 “다바르”(말씀)이라는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광야는 “말씀으로부터,” "말씀이 있는 곳," 혹은 "말씀이 나오는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광야는 버려진 땅(desert)이지만, 히브리인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훈련하는 장소였습니다. 광야는 시내산에서 배운 말씀, 성막, 제사, 그리고 절기를 훈련하는 장소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광야 생활의 중심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딜 가든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자 예배처소인 성막은 그들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막의 지성소를 히브리어로 “디비르”라고 합니다. “디비르”라는 말도 히브리어 “다바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와 지성소는 히브리어 “다바르,”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광야와 지성소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로 훈련받은 광야를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데스 바네아” 광야에서 훈련 시키셨습니다. 가데스바네아 광야의 이름의 의미 또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혹은 “거룩하게 정화하는 방황 “(Holy purifying wandering )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도시로부터 떨어진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임재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늘이 가깝게 보이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쁜 이집트의 일상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하나님을 가깝게 느끼고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광야에서의 이동을 결정하는 요소입니다. 그것은 지성소에 임한 구름 기둥이었습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일 때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를 그들이 임의로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름 기둥이 머무는 곳에 그들은 머물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동을 멈출 때도 그들의 의지대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냥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주님의 임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이 있을까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을까요? 굳이 구분을 한다면, 그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었고, 따라가지 않은 사람은 실패자였습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풍요로운 사람이었고,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빈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우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인도 하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영예로은 사람이었고,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불명예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광야에서는 그 인도하심을 따라 멈추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길을 것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었습니다(시1:1-3).

우리의 광야는 어디입니까? 왜 우리를 수많은 나라 중에 그리고 도시 중에 어스틴 텍사스에 보내셨을까요? 주님은 왜 우리를 이곳에 부르셨을까요? 왜 우리를 우리의 가정으로, 직장으로 부르셨을까요? 당신이 선 자리, 그곳이 광야입니다. 그곳은 극기 훈련 장소가 아닙니다. 메마른 황무지도, 불모지도 아닙니다.  광야,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가는 훈련장소입니다.

행복한 목사 김형중 드림 Copyright 2018 by Hyung Joo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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